"수단 사태는 우리 잘못"…미국 前고문의 뼈아픈 반성문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NYT 기고…"서방의 외교실패"

FP도 "서방, 민정 무산됐는데 군통합 그대로 추진" 지적

수단 구데타 군정 지도자인 압델 파타 부르한 장군(왼쪽)과 민병대 신속지원군(RSF)을 이끄는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 장군 [AFP  자료사진]

수단 구데타 군정 지도자인 압델 파타 부르한 장군(왼쪽)과 민병대 신속지원군(RSF)을 이끄는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 장군 [AFP 자료사진]

이지헌 기자 = 수천명의 군인·민간인 사상자를 내며 내전 직전으로 치닫고 있는 수단의 비극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군벌 실력자들이 권력을 순순히 양보할 것이라 믿은 서방측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 랜드(RAND)연구소의 재클린 번스 선임연구원은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기고문 '수단 분쟁은 우리 잘못이다'에서 "국제사회가 진정한 정치개혁과 민주정부를 원하는 목소리보다 부패한 무장세력의 목소리를 우선시한다면 지난 한 주 수단에서 목격한 폭력과 고통의 악순환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번스 연구원은 과거 미국 수단 특사의 고문을 지내며 수단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관여한 바 있다.

수단에서는 지난 15일부터 수도 하르툼을 중심으로 압델 파타 부르한 장군의 쿠데타 군정과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 장군이 이끄는 신속지원군(RSF)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유엔에 따르면 양측 교전으로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400명이 숨지고 3천500명이 다쳤다.

국제정세 분석가들은 이번 수단 무력 충돌의 배경으로 2019년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 시민 세력이 군벌과 대적하기엔 힘이 너무 미약했다는 점, 러시아, 이집트 등 외세가 군벌 대립을 조장했다는 점 등을 꼽고 있다고 번스 연구원은 소개했다.

그는 이런 설명에 동의하면서도 "문제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국제사회가 분쟁 해결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무장단체나 군벌의 이익을 과도하게 대변한 게 잘못된 결과로 이어진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장단체 간 권력을 나누는 평화협정 체결에 초점을 맞춘 방식의 분쟁 해결이 지속 가능한 평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며 "심지어 단기적인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번스 연구원에 따르면 오랜 내전 종식 후에도 수단 내 분쟁이 종식되지 않자 서방 지원을 받는 유엔과 아프리카연합 등 국제기구는 군벌들을 상대로 서로 양보를 얻어내는 형태의 평화협정을 얻어내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군벌들이 평화협정에 서명하더라도 이를 지키도록 강제할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는 자신의 협상 경험을 토대로 군벌 지도자들이 폭력 종식에 대한 논의보단 호텔 수영장에서 축구 중계를 보고 사익을 위한 일정을 잡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번스 연구원은 "국제사회는 폭력적인 분쟁을 종식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평화를 위한 앞으로의 노력은 누가 중요하고 누가 중요하지 않은지를 고려해야 한다"며 "무장 단체들의 총을 내려놓게 하자는 일념 탓에 평화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은 곧잘 버려진다"고 말했다.

피란 하는 '유혈 충돌' 수단 주민들
피란 하는 '유혈 충돌' 수단 주민들

북아프리카 수단의 정부군과 준군사조직 신속지원군(RSF) 간 유혈 충돌이 발생한 지 닷새째인 19일(현지시간) 수도 하르툼에서 주민들이 피란하고 있다. 2차례 휴전 합의를 어기고 분쟁을 이어온 양측은 이날 새로운 휴전안에 합의했음에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2023.04.20

'미완의 수단 민주주의' 공저자이기도 한 저스틴 린치도 20일 미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 기고문에서 수단 민주화를 바라는 미국 등 서방의 미숙한 개입이 이번 유혈 충돌의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준군사조직인 RSF를 쿠데타 군정의 정규군과 통합하려 한 잘못된 노력이 예측할 수 있었던 비극적 분쟁사태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은 2019년 부르한 장군과 다갈로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30년간의 독재를 마치고 권좌에서 내려왔다.

그에 앞서 정부의 빵값 인상에 대한 항의로 촉발된 수개월간의 민중 봉기가 독재정권 축출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수단에 민정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미국 등 서방국은 부르한 장군 등 군부의 참여하에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2022년 선거로 민주 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선거 시한이 다가오자 부르한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2021년 쿠데타로 과도정부를 다시 무너뜨렸다.

린치는 "2021년 쿠데타로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군부의 약속은 공허한 것으로 판명됐다"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정권 이양 계획은 근본적으로 잘못됐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미국과 유엔임무단이 2019년 과도정부 수립 당시 세운 민간으로의 정권 이양 계획을 그대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린치는 특히 미국과 유엔임무단이 추진한 화해 협상과 안보 부문 개혁방안이 이번 무력 충돌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수단 민주화를 위한 안보 부문 개혁방안은 부르한 장군의 쿠데타 군정 정규군과 RSF를 통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린치는 "문제는 부르한 장군과 다갈로 장군 모두 모두 자신이 쌓아온 권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보 부문 개혁은 두 장군이 각자의 세력을 불리도록 하는 경쟁을 불러일으켰다"며 "군벌들은 공개적으로는 개혁과 민주주의를 약속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미국과 유엔 관리들뿐이었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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